[세계의 역사] 대공황, 세계대전의 암울한 전조현상
1. 대공황 1929~1939년
미국의 1920년대 경제 호황은 전쟁에 짓밟힌 유럽에 복구비용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황은 1929년 말 주식시장의 붕괴로 끝났고, 그 충격은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져갔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주주들은 패니엑 빠져 주식을 투매하기 시작했다. 10월 말이 되자 시가 총액이 9월 초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주식시장 붕괴에 놀란 소비자들은 지출을 줄였고, 그 결과 기업들은 생산을 축소하고 노동자를 해고하게 되었다. 미국의 실업인구는 1930년 500만 명에서 1931년 1천 300만 명까지 급증했다. 1932년이 되자 사람들은 은행에 대한 신용을 잃고 돈을 집에 감춰두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였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는 '미국을 위한 뉴들 정책'을 제안한 민주당 후보 루스벨트에게 패했다. 루스벨트는 은행체계를 안정시키고 미국 민간자원보존단 같은 기관을 신설해 경제 회복을 촉진했다. 뉴들 정책은 대공황을 끝내지는 못했으나 다른 국가에서 나타났던 정치적 격변은 막았다. 월스트리트의 붕괴로 겁먹은 미국 투자자들이 대출 상환을 요구하면서 독경제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독일 실업률은 1929년과 1930년 사이에 배로 늘어났고, 공산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 사회당이 국회에서 큰 세력을 얻었다. 독일의 고통을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고, 1933년 비상지휘권을 선포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서 교훈을 얻어 '제3제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해 독일은 부활시키고자 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의 재발을 우려하여 1936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꺠고 라이란트를 재점령하는 것을 용인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9년 농업을 집단화하고 산업화를 촉진하는 무자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권을 강화했다. 1930년에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을 처형하거나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는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스탈린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당과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에 군사적 원조를 보냈다. 당시 전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같은 시점 아시아에서도 일본 내 경제 혼랑으로 입헌정치가 힘을 잃고 제국주의 확정을 추구하는 군벌세력이 확대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1937년 일본군이 기어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다가올 세계대전의 암울한 전조를 보여주었다.
공군력의 힘
1903년 키티호크에서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의 최초 비행이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군대가 비행기의 군사적 용도를 발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조종사들은 주로 정찰 임무를 맡았고, 가끔은 적대국과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략적 폭격을 수행하는 일부 비행사들은 도시나 공장을 공격했으나, 초기 항공기는 인구 중심지에 큰 피해를 가하기에는 항속거리나 용적이 부족했다. 종전 후 단엽기에 강력한 성형엔진을 도입하는 등의 발전을 통해 비행기는 멀리 있는 목적지까지 대형 화물을 탑재하거나 공중에서 대량파괴를 저지를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은 1930년대에 공군력에 크게 투자하여 스페인 내전에서 루프트바페를 시험했다. 독일공군은 1937년 4월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로부터 역사에 남을 만한 항의를 받았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는 공포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고통받는 주민들을 그리고 있다.
히틀러
제1차 세계대전주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독일이 겪었던 패배의 경혐을 바탕으로 정치관을 발전시켰다. 최초 군대 신체 검사에서 체력 부족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전쟁 때문에 조건이 바뀌면서 1914년 바바리안 예비보병연대에 입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공을 세워 두 차례의 철십자 훈장을 받은 히틀러는 만약 모든 독일인이 자신만큼 대의에 충실했다녀 독일이 승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 초에 반란을 일으켜 빌헬름 2세를 내몰았던 혁명세력에 패전의 원인을 돌렸다. 그러나 독일은 사실 봉기가 시작되었을 떄 이미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애국적인 독일 유대인이 전쟁에서 세운 공헌은 간과하면서, 히틀러는 11월혁명을 '유대인 볼셰비기' 들의 음모라고 규정하고 유대인을 독일 패배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역사를 잘못 이해한 히틀러는 독일이 승리의 의지를 되찾고 국가를 배반한자들을 제거하면, 치욕감을 딛고 유럽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근거없는 믿음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벌어졌고, 독일과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욱 심각한 참사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