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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역사사전

[세계의 역사] 남아메리카, 세계 대항해의 시작

by 축구 도감 2023. 3. 23.

대항해

1. 남아메리카 (선사시대~1500년)

남아메리카에서 고대와 중세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발전은 오늘날의 페루에서 이루어졌다. 기원전 500년경에 페루 안데스 산맥 고지대의 제사센터인 차빈데우 안타르는 재규어 등 다양한 열대우림 동물의 정령을 숭배하던 세계 각지의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 분명히 차빈데우안타르의 제사 지도자는 열대우림 출신이었을 것이고, 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온갖 기적과 생산성의 원천이라고 믿던 안데스 서쪽지역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을 것이다. 500년이 되자 페루 북부의 모체 강을 따라 체계를 갖춘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강 유역의 거대한 관개공사로 경작지가 넓어지면서, 상류층 귀족을 비롯해 사회가 분화되기 시작했다.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금과 주석으로 화려한 가면을 만들었고, 이는 제물로 바쳐지는 포로들과 함께 통치자자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도공은 장식이 있는 점토 그릇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투구를 쓴 전사들이 적을 때리는 장면 등 당대 사회상을 생생히 재현했다. 수백만 개의 흙벽돌로 만들고 화려한 벽화로 장식한 피라미드를 보면, 모체 문화가 붕괴되기 전까지 메소아메리카의 발달된 문명 수준에 거의 근접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체는 600년경에 가뭄,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체 남쪽에서 관개시설로 비옥해진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다봐야만 전체를 볼 수 있고, 아마도 하늘에 있는 영혼을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비적인 지상화를 사막에 남겼다. 1000년경 모체 강 유역에서는 또 다른 발달된 사회인 치무 왕국이 등장했다. 이곳의 수도인 찬찬에는 거의 3만 명이 거주했다. 1300년경 치무 왕국의 통치자는 정벌에 나서 페루 해안에 600마일이 넘는 영토를 획득했지만, 나중에 더 우세한 잉카족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잉카족은 1400년경 안데스 산맥의 쿠스코 계곡에 머물기에는 세력이 너무 커지자 제국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잉카 제국의 성공은 열정적인 통치자였던 파차쿠티에게서 기인한 바가 크다, 잉카는 문자가 없었지만 끈으로 매듭을 묶어 꼼꼼한 기록을 남겼다. 모든 사람은 군사나 농부, 혹은 도로망 공사 등의 일꾼으로 제국에 주기적으로 봉사해야 했다. 잉카의 놀라운 도로망은 두 개의 주요 간선 도로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해안선을 따라가고, 다른 하나는 안데스 산맥을 따라갔으며, 하루 여행이 끝나는 구간마다 간이역이 있었다. 1500녀경의 잉카제국은 훌륭한 체계를 갖추고, 현재의 에콰도르 남쪽의 칠레까지 2천500마일에 걸쳐 있었으며, 거의 100개의 소수민족을 흡수한 상태였다.

 

잉카인의 제물

잉카인은 왕의 즉위식처럼 흔하지 않은 행사에서는 신에게 200명의 젊은이를 제물로 바쳤다. 또 그보다 자주 태양신을 기리기 위해 라마를 제물로 바치거나 음식을 공물로 내놓았다. '이 음식을 드시옵소서, 태양의 신이여, 그러면 우리가 당신의 자손임을 알게 되리 오리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잉카인은 또한 몇몇 여신을 숭배했는데, 대지의 모신과 태양신의 아내인 달의 모신이었다. '태양의 처녀들'로 선택된 헌식적인 신도들은 신전에 칩거하면서 화려하게 수놓은 작물을 짰다.

 

마추픽추는 누가 건설했을까?

1438년 파차쿠티 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잉카 제국은 이미 빠르게 팽창 중이었지만, 그는 제국을 발전시키고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앞으로 왕이 재임 중에 획득한 재물은 그들의 유해를 미라로 만들고 돌보는데 바쳐져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런 관습은 불멸의 통치자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화시켰다. 또 통치자마다 정복을 통해 자신의 재산과 명성을 얻는 데 주력하게 했다. 파차쿠티 왕이 1471년 그의 아들을 위해 퇴위했을 때, 어린 왕도 부친이 시작한 치무 왕국 정복을 마치며 그의 뜻에 따랐다. 파차쿠티 왕은 전정에서 패배한 세력을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위해 잉카 본토 근처에 거주하도록 지시했다. 충성스러운 부하는 새로 정복한 영토의 식민지 건설에 파견했다. 그는 퇴위하기 전에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근처의 산 정상에 주거지이자 제사센터인 마추픽추를 건설했다.

 

2. 세계 대항해 (1492~1522년)

세계는 1500년경 유럽인들이 지구를 향해하고 새로 발견한 땅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근대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중세말기 중동 및 극동과의 무역으로 해외진출의 동기가 생기면서 갈고닦은 항해술을 바탕으로 이러한 도약을 이루었다. 1500년 전까지 성공한 항해사들은 1400년대 초기에 아프리카부터 페르시아 만 사이를 7번 항해한 중국인 정화 장군처럼 대부분 유럽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자들이 고립주의를 택하면서 중국의 해군은 쇠퇴했다. 오스만 제국은 향해 술과 아랍 세계의 해양자원에서 수익을 얻었지만, 중동은 이미 극동에까지 이르는 육로와 해로가 확보된 상태였으므로 값나가는 물건을 얻기 위한 새로운 통상로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서양의 유럽인들은 이러한 물건을 직접 얻으려면 오로지 전인미답의 경로를 찾아야만 했다. 이처럼 수익을 얻으려는 동기와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열망이 결합되어 통치자들은 해상무역과 향해를 장려했고, 결과적으로 유럽 제국을 성장시켰다. 이런 노력을 주도했던 국가는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1400년대 중반 '항해왕' 엔리케 왕자는 항해술을 개선하고 서부아프리카 해안 원정을 후원하기 위해 학교를 세웠다.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와 금을 교환했고, 점차 인도로 진출하여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최초로 해로로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유럽과 극동 간의 최단 경로가 밝혀졌지만, 대서양을 통한 더욱 짧은 경로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새로운 땅이 속속 발견되었다. 1492년에는 이탈리아 크리스토터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와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을 얻어 그가 인도라고 생각했던 땅인 카리브해에 도착했다. 스페인을 위해 향해를 떠났던 또 다른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0년 후에 대서양 일대가 사실상 신세계라고 결론 내렸다. 결국 그의 업적을 인정해 그 대육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1519년 페르디난트 마젤란이 시작한 원정대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지나 1522년 유럽에 도착해 배로 지구를 일주하면서 지국의 범위가 명확해졌다. 

 

항해의 발전

지구를 항해할 때, 유럽 항해사들은 다른 지역과 과거의 항해기술 및 노하우를 활용했다. 예를 들어, 나침반과 선미재 키는 중세 중국에서 처음 개발된 후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런 발명은 때때로 세계 여러 곳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정오에 지평선 위 태양의 각도를 측정하여 위도를 계산하는 아스트롤라베 등의 기기는 고대에서 유래되어 아랍 향해사들이 발전시켰고, 이를 포르투갈인이 전수받았다. 영미한 항해사와 학자들은 콜럼버스가 몸소 입증하기 전에도 이미 지구가 동글 것으로 예상했다. 오히려 당대에 남아있던 결정적인 의문은 지구가 얼마나 넓은 가의 문제였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아시아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고, 그 실수가 위대한 발견으로 이어졌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탐험가. 콜럼버스는 1492년 히스파니올라에 발을 디뎠고, 카리브해 연안을 식민지로 삼아 유럽의 전 세계적 팽창을 시작했다. 1493년 다시 히스파니올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남겨두고 간 선원들이 죽고 그들이 차지했던 항구가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섬에 정착하여 거기에 살던 타이노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496년에 콜럼버스는 거의 500명의 포로를 배에 태워 스페인으로 보내고, 이 여행에서 살아남은 포로는 칙령을 위반한 죄로 노예로 팔려나갔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에서 금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대대적인 신세계 정복으로 이어져 스페인에 막대한 부와 세계 최고 열강의 지위를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