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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역사사전

[세계의 역사] 오세아니아와 북아메리카, 메소아메리카(선사시대~1500년)

by 축구 도감 2023. 3. 23.

티칼 신전의 그림

1. 오세아니아 및 북아메리카

1500년경 유럽 항해사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훨씬 전에도 구세계인이 모르는 땅에서는 문명이 발달했고, 상당한 지식과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다. 1만 5천~2만 년 전에 빙하기로 해수면이 낮아지면서 형성된 육로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알래스카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9000년이 되자 인류는 남아메리카의 남단까지 도달했다.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작은 무리를 지어 수렵과 채집을 했고, 기원전 3000년경부터는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옥수수, 콩, 호박 같은 작물 농사가 북쪽을 전파되자, 오늘날 미국 위치에 살던 일부 부족은 거대한 무덤 속에 보석으로 둘러싼 채 족장의 시체를 매장하는 등 사회를 발전시켰다. 이런 최초의 문화는 기원전 500~100년 사이에 오하이오 강 유역에서 발전한 아데나 문화와 호프웰 문화였지만, 가장 큰 무덤을 지은 이들은 약 1000~1300년에 미시시피 강 유역과 남동부지방에서 번영했던 미시시피인이었다. 이들의 가장 인상적인 정착지는 오늘날 미국 세인트루이스 부근의 카호키아였다. 전성기에는 2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대한 무덤 주변에 모여 살았다. 다른 고대 문명의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족장도 죽을 때 신처럼 떠받들어졌다. 한 통치자는 2만 개의 조개껍질을 엮어서 만든 웅장한 무덤 공물과 제물로 바쳐진 60명 이상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미시시피 사회는 푸에블로족 또는 아나사지족으로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남서부 지역의 주거지를 포기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뉴멕시코의 차코캐니언에 오늘날의 아파트와 유사한 다층구조의 집단 주거시설과 키바 등 놀라운 건축물을 남겼다.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고대 푸에블로족은 이 지역을 버리고 메사베르데 같은 더 높고 습한 지대의 암굴주거지로 옮겼고, 그다음에는 14세기 푸에블로 문화가 시작된 리오그란데 강 유역처럼 영속적인 수자원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고립된 사회는 폴리네시아인들로, 그 조상은 기원전 2000년경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를 떠나 사모아와 타히티 같은 먼 태평양 섬을 식민지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현회 장치가 달린 배에 개와 돼지, 그리고 참마와 빵나무 같은 작물을 싣고 출발한 용감무쌍한 향해자들은 기원전 100년경 하와이에 도착했고, 기원전 500년 경에 이미 이스터 섬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 시기가 수백 년쯤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폴리네시아인은 세습 족장이 이끌었다. 이스터 섬의 라파누이 사람들은 신과 신적인 족장을 표상하는 거대한 돌기둥을 세웠다.

 

초기 아메리카인에 대해 알려진 바는?

현대 멕시코의 북쪽에서는 거대 제국이 발달하지 않았다. 물소 등의 동물 사냥으로 먹고살던 부족에게는, 기동성이 높고 권력이 내부로 집중된 소규모 단위의 생활이 가장 적합했다. 그러나 비옥한 지역에 살던 미시시피인처럼 정착된 집단들은 봉건제와 유사한 정치체계를 발전시켰다. 외곽 도시의 지역 족장은 카호키아 같은 중심 도시의 통치자를 영주로 모시면서 작물, 노동력, 병역들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당시 카호키아의 거대한 봉분 건설에 노동력을 바쳐야 했던 사람들은 이를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미시시피인은 통치자가 모든 생명을 부양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원인 태양신의 현세적 화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2. 메소아메리카

유럽의 중세시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신앙과 관습이 유사한 몇몇 강력한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가 번영하고 있었다. 메소아메리카란 오늘날 멕시코시티에 해당하는 멕시코 계곡부터 북쪽의 파나마 지협까지 일컫는다. 이 지역의 문화는 고대의 올메크인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올메크인은 멕시코만 근처의 남부 멕시코에 살았고, 산로렌초와 라벤타에 거대한 제사센터를 건설했다. 이곳에는 흙으로 만든 피라미드, 석조 사원, 집단의식 성격의 경기를 수행하던 구기장 등이 있었다. 또 올메크의 통치자를 상징하는 듯한 거대한 석조 두상이 세워져 있고, 글리프라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올메크 문화는 기원전 400년경 라벤타가 파괴되면서 함께 사라졌지만, 유카탄 반도에 거주하던 마야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야 문명은 600년경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팔렌케, 코판, 티칼 등의 도시국가들이 경쟁적으로 확장하며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마야의 왕과 여왕들은 별자리의 움직임에 따라 경쟁국 공격의 시점을 정했다. 또 그런' 별의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들은 보통 신에게 승리의 공을 돌리는 제물로 바쳐졌다. 왕족의 피는 특히 신에게 호소력이 높다고 생각하여, 마야 통치자는 가끔씩 자신의 피를 공물로 바쳤다. 인구밀도가 높았던 마야 도시들은 외각지역 자원을 무리하게 징발하여 지역주민의 분노와 반발을 샀고, 900년경 문명의 멸망에 빌미를 제공했다. 마야인의 교역상대 중에는 비옥한 멕시코 계곡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 상인들이 있었다. 6세기까지 이 이 거대한 도시 중심지에는 15만 명 이상이 거주했고, 그중 다수가 수출품을 만드는 장인들이었다. 마야 도시국가처럼 테오티우아칸 역시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인근지역 자원을 무리하게 끌어들이다가 700년경에 멸망했다. 그 후 멕시코 계곡은 호전적인 톨텍인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은 수도 툴라에서 포로를 한꺼번에 재물로 바쳤고, 12세기에 가뭄이 들자 신하들에게 점점 부담스러운 공물을 요구했다. 1170년경 반란이 일어나 툴라가 무너졌고, 톨택제국도 결국 붕괴했다. 톨텍 문명의 뒤를 이은 것은 강력한 아스택인이었다. 이들은 15세기에 북부에서 멕시코 계곡으로 옮겨와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위치에 테노치티틀란이라는 거대한 수도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했다. 아스텍인도 마야인과 마찬가지로 천제를 연구했고, 복잡한 달력을 이용했으며, 구전설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왕은 전쟁을 벌이고 포로를 잡아 자신의 대관식을 기념했고, 이런 포로들은 신의 은총을 기원하며 테노치티틀란의 거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수천 명식 제물로 바쳐졌다. 아스텍의 몇몇 경쟁국은 믿음직한 동맹국으로 바뀌었지만, 나머지는 무거운 조공을 강요당해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고, 나중에 스페인의 침략자들은 이 점을 이용해 아스텍 제국을 분열시켜 정복했다.

 

마야의 구기 경기

티칼, 코판, 치첸이트사 같은 마야도시 유적지에는 중앙에 거대한 구기장이 있다. 마야인이 이 경기장에서 펼친 구기 경기는 일종의 의식으로, 옥수수 신이 지하세계 왕과의 시합에서 패해 죽임을 당한 후에 다시 옥수숫대의 삶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는 신화 속의 시합을 재현했다. 구기 경기의 패자는 그들의 피가 대지를 살찌워 옥수수 신과 다른 마야신의 은총을 북돋우리라는 믿음에서 제물로 바쳐졌다. 각각 두 명씩 구성된 팀이 사람 머리 크기 정도의 단단한 고무공으로 경기를 펼쳤다. 선수들은 보호장비를 갖추고 엉덩이와 어깨로 공을 쳤다. 경기의 목표는 서로 상대편 진영의 작은 문에 공을 집어넣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