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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역사사전

[세계의 역사] 아프리카, 아시아 (500년~1500년)

by 축구 도감 2023. 3. 23.

칭기즈 칸

1.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중세에 지중해 해안과 서아프리카 사이를 오가는 대상들과 인도양 주변 국가와 동아프리카 사이는 오가는 선박들을 통해 무역이 번성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750년경에는 이집트와 과거 로마나 비잔틴 제국의 일부였던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무슬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다른 신앙을 고집했는데, 특히 고립된 지역의 에티오피아인이 기독교로 남아있다. 9세기가 되자 지중해 해안의 무슬림 상인들은 낙타를 타고 사하라 사막을 건너가, 서아프리카의 비옥한 니제르 강 및 세네갈 강 유역에 살던 주민들과 교역을 시작했다. 가나 왕국은 무슬림 상인에게 금, 상아, 노예를 제공하고 옷감, 소금, 무기 등을 얻는 이 교역을 통해 급 성장했다. 가나의 통치자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조상의 영혼이나 자연신의 그림을 향해 기도하는 뿌리 깊은 종교적 관습은 쉬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나인은 위대한 예술적 솜씨와 열정을 바탕으로, 영혼을 기리는 가면이나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물건을 창조해 냈다. 가나는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부와 권력을 얻으며 확장해 나갔다. 그러다가 1200년경 사하라 사막에서 유목민이 몰려와 가나와 그 일대를 흡수하고 말리 제국을 수립했다. 1312년에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임한 말리 제국의 만사 무사 국왕은 독실한 무슬림으로, 수도 팀북투를 거대한 이슬람 문화 중심지로 육성했다. 1400년대 중반 말리는 다시 송가이 제국에 흡수되었다. 이 제국은 서아프리카를 100년 이상 지배하다가 모로코 군대에 완패하여 멸망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모가디슈와 몸바사 같은 항구에 도착한 이슬람 상인들이 스와힐리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해안사람'이란 의미의 스와힐리족은 이슬람교를 수용하고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기존 언어에 흡수하면서, 번영하던 도시 문화를 도시국가로 발전시켰다. 스와힐리 상인은 아프리카 내륙에서 획득한 물건을 외국의 상인들에게 팔면서 중개상 노릇을 했다.  그 결과 내륙지방에서도 번영하는 왕국들이 생겨났다. 특히 짐바브웨 왕국에는 독특한 석조 건축물과 약 2만 명의 주거지로 꾸며진 대짐바브웨라는 인상적인 수도가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왕국들처럼 짐바브웨도 금, 상아, 노예를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러나 유럽인 아프리카 흑인을 대서양으로 실어 나르기 이전의 노예무역은 그토록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산업이 아니었다. 1400년대 말에 포르투갈 상인들은 매년 수천 명의 노예를 수출했는데, 나중의 엄청난 교역량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스와힐리어란 무엇인가?

스와힐리어는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로, 동부 및 중부 아프리카 수백만 인구가 모국어나 제2언어로 구사한다. 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 즉 탄자니아에서 케냐까지 인도양과 접해 있는 동부 해안에서 발달했다. 해안가에 살던 반투족은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해외 상인이나 식민지 개척자를 접하면서, 반투어에 다양한 언어를 혼합하여 스와힐리어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스와힐리어의 숫자 6, 7, 9는 아랍업을 차용하지만, 그 외 1부터 10까지의 숫자는 반투어를 그대로 쓴다. 스와힐리어로 차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고, 탁자는 포르투갈어, 버스는 영어, 학교는 독일어 등 유럽어에서 빌려왔다.

 

만사 무사

국왕, 여행가, 무역상. 말리의 국왕 만사 무사는 1342년 1천 명이 넘는 수행원관 각각 300파운드의 금을 짊어진 100마리의 낙타를 이끌고 메카로 화려한 성지순례를 떠나 이슬람 세계의 전설이 되었다. 아랍의 한 연대기 기록자에 따르면, 그가 이집트에서 너무 많은 금을 사용해 금값이 떨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보인도 아랍인에게 큰 인상을 남겼지만, 아랍의 문화는 그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국의 수도 팀북투로 돌아가면서, 그는 아랍의 장서와 아랍에서 사원과 궁전을 지었던 건축가를 함께 거느리고 갔다. 아프리카에서 만사 무사 치하의 팀북투는 중동의 바그다드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학자, 예술가, 시인들의 천국이었다.

 

2. 아시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도 중세시대에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아시아 사회는 다양한 신앙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인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힌두교도였지만, 북쪽의 인더스 강 유역은 7세기 초반에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하르샤 왕이 다스렸으며, 후에는 무슬림이 정복하여 결국 오늘날 파키스탄인의 상당수를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 인도 상인은 다양한 물건, 관습, 신앙을 남동아시아로 들여왔다. 남부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던 푸난의 왕들은 힌두교신을 숭배하고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다. 푸난이 멸망한 후에 캄보디아에서 패권을 잡은 크메르 왕국은 힌두교와 불교를 차례로 받아들였다. 크메르의 왕들은 900년경부터 위대한 12세기 힌두교 사원인 앙코르와트를 비롯해 두 종교에 대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공존했다. 당나라 황제들은 단명한 수나라의 뒤를 이어 유교사상을 지지하면서, 과거시험을 통해 유교 문헌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관직에 등용했다. 중국은 당나라와 그 뒤를 이은 송나라 때 번영을 구가했다. 중국의 발명가들은 나침반, 화약, 그리고 가장 값나가는 수출품이었던 자기를 만들었다. 한국은 중국에 예속되기를 거부했으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10세기 헤이안시대 일본의 막부에서는 문학과 예술이 발전했다 다음 세기부터는 무사들이 지방 영주인 다이묘의 봉신이 되고, 다이묘가 다시 쇼군이라는 막부 수장의 봉신이 되는 봉건주의 체제가 뿌리내렸다. 1206년 칭기즈 칸이 통일한 몽골족이 중국 북부와 서부를 정복하면서, 아시아에도 격동의 시대가 펼쳐졌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 정벌을 완수했으나 일본 정복에는 실패했다. 몽골족은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하기 전까지 러시아와 중동 대부분을 차지했다. 몽골족의 중국 지배는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끝이 났다. 중동에서는 투르크족이 정복자 티무르와 오스만 제국 하에서 세력을 회복했다.

 

일본의 문자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일본은 처음 중국 문물을 접했을 때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한자를 도입했다. 일본의 서기와 학자들은 수년간 중국 문헌을 공부하고 베껴 쓰면서 복잡한 한자를 터득했다. 그러나 9세기에 훨씬 간단한 일본의 표음문자인 가나가 만들어졌다. 가나는 오래 교육받지 않았도 쉽게 익힐 수 있어서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사적인 일기나 연애편지 등에 사용되었지만, 금방 시와 산문에서도 즐겨 쓰는 문자가 되었다. 1000년경 일본 여류작가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와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는 일본 문학의 출발점을 알리는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를 묘사했다. 이들의 예술가적 노력 덕분에 소설이라는 새로운 일본어 문학 형식이 생겨났다.

 

칭기즈 칸 

몽골의 정복자. 칭기즈 칸은 '우주의 군주'라는 뜻으로, 아명은 태무친이다. 몽골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경재 부족에게 독살된 후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몽골족은 말을 타고 자주 옮겨 다니며 힘든 삶을 살았다. 게다가 테무치은 성장기 내내 아버지의 적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성과 아이를 노예로 삼아 적대적인 무리를 단칼에 진압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 뜻에 거역하는 형을 죽이고, 많은 몽골 부족을 자기 밑으로 규합했다. 제국을 수립하면서, 저항하는 자는 죽이되 싸우지 않고 투항하는 적은 살려두고, 다양한 사상의 인재를 포섭하는, 외교와 공포가 결합된 정책을 펼쳤다.